• 서브비주얼1
조화서 베드로 성인은 그의 아버지 조 안드레아(1839. 기해박해)가 순교한 후에 ‘수원 도마지’에서 남방제로 이주하여 살았고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조윤호 요셉 성인(1848)을 낳아 성가정을 이루었다. 조 베드로 성인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마부와 복사로 선교 활동을 돕고 전국의 신자 촌을 모시고 다녔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도(道)와 5천여 리(里)를 걸으며, 많은(3815명) 신자를 방문하였다.

순방 중에 포졸들의 습격과 외교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수없이 쫓겨나고 붙잡혀서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경신박해(1860) 때,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한국이름 장경일)’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고, 그 길에 최양업 신부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친 아주 위급한 상황을 알린 이가 바로 조 베드로 성인이었다.

최양업 신부 선종(1861) 후에 베드로 성인은 남방제로 돌아와 살다가 1864년 전라도 전주의 성지동(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깊은 산골의 교우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늘 낙천적이고 천주교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신자로서 의무를 충실히 하고,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포졸들에게 아들과 함께 체포(1866. 12. 5) 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고 감옥에서 교우들을 만났을 때, 순교를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도록 격려하였는데, 이로 인해 더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함께 체포된 아들에게 천국에서 서로 만날 것을 다짐하며 전주 숲정이(1866. 12. 13. 52세)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아들 조윤호 요셉(1848-1866. 12. 23) 성인은 남방제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아버지 조 베드로 성인을 따라서 교우촌(전라도 전주 성지동)에서도 살았으나 포졸들에게 자진하여 아버지를 따라 함께 체포(1866. 12. 5) 되어 사형장으로 압송되자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며 간청했지만, 당시 형법에는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곳에서 한 날에 처형할 수 없다고 거절되었다.

그 후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신앙을 지켰고 가혹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으며, 신앙의 강한 빛을 보여준 아버지를 따라 전주 서천교(1866. 12. 23.)에서 모진 매를 맞고 노끈으로 목 졸려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로 부친이 순교한 지 열흘 만이었다. 따라서 조부 조 안드레아, 부친 조 베드로에 이어 손자 조윤호 요셉까지 3대가 순교로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누렸다.